Begin faster than anyone
누구보다 빨리 시작하라
양현석 어록
·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외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요. 퇴근해 집에 가면 쓰러져 자고, 다시 눈뜨면 일했던 기억뿐이에요. 내가 할 줄 알고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행복했어요.
· 자신의 장단점을 빨리 파악하세요.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시작하세요. 누구나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은 없어도 누구보다 빨리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있어요.
· 다른데 신경 쓸 시간이 없어요. 잘하는 것 한 가지만 죽어라 파는 겁니다. 제가 잘하는 것은 음악이고, 잘 만들어 널리 알리는 거예요. 싸이도 음악으로 이렇게 '월드스타'가 된 것처럼 기획사는 음악에 집중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 너희들이 YG에 들어왔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성공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힘든 일이야. 수십 수백 팀과 경쟁해서 존재감을 나타내려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하고, 다른 그룹들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있어야 해.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끝나는 거야.
이영호 (패션 디자이너 빅터리)
방송연예 패션 분야 에디터로 첫 걸음을 내딛으며 포토그래퍼 김중만으로부터 처음 일을 배움. 축구선수 안정환 인터뷰를 비롯해 스타, 안재욱과 함소원 등 의상을 만들고, 패션 스타일링 매거진 아트디렉터로 활동함.
현재, 패션디자이너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 중으로, 극본과 감독, 제작을 맡은 영화 '남자친구가 뭐길래(2011),를 올래TV에서 인기리에 상영했고, 영화 '내 발이 칸에게 말하다(2012)'를 2012년 프랑스 칸영화제, 중국 상하이구제영화제에 출품되었다.
'패션디자이너 빅터 리'로 활동하며 홍콩패션위크에서 세계무대에 데뷔, 중국 남방TV(TVS)로부터 한국 패션디자이너 최초로 초대받아 중국 및 홍콩 등지에 패션쇼가 생중계 되어 중화권에 알려졌고, 패션브랜드 KONGNAMUL이란 순우리말 브랜드로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양현석이 다니던 중등중학교 2학년 시절, 소풍을 가서 친구가 장기자랑으로 선보인 로봇 춤을 양현석이 떠올린 기억이다. 당시 가정 형편이 풍족하진 않았던 소년 양현석은 잘사는 친구들에게 갖는 부러움이나 질투심 감정이 없진 않았는데, 마침 잘사는 친구가 소풍에서 선보인 로봇 춤 브레이크 댄스 이 양현석의 눈에 들어왔다. 소풍에서 돌아온 뒤에 그 친구의 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춤을 배워야 되겠다.' 라고 마음 먹고 춤이 무슨 춤인지 자신에게도 가르쳐 달라고 했고, 춤을 배우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말하곤 했다.
서태지와 운명적인 만남
양현석이 고등학교 졸업 후에 잘 다니던 지도회사를 구만두고 곧장 이태원에서 댄스팀 '스파크' 생활을 했다.
신림동 댄스 클럽 생활 시절 자신과 함께 춤을 추던 친구가 TV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그 즉시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춤' 하나만큼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던 양현석의 '오기'가 발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렇게 댄서 생활이 시작이되고, 스파크 활동을 할 때마다 번번히 찾아오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이름이 정현철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매번 뒤에서, 주위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것과 달리, 정현철은 양현석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동안 혼자 연습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으니 직접 가르쳐 달라고 했다.
1990년대 초 450만 원이란 돈은 대학교 1년치 등록금이 넘는 큰돈이었다. 춤을 배우기 위해 그 돈을 양현석에게 건넨 정현철이 1:1 첫 레슨을 시작한 후 양현석이 사라진 걸 알고서 어떤 행동을 했을까?
만약 정현철이 보통 사람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터. 양현석이 군대에 입대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론 묵묵히 시간을 기다렸다.
양현석이 입대를 하고 다시 의가사 제대를 했을 무렵, 그 당시에 어떤 상황이었을까?
양현석은 서태지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우연히 예전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걸까?
입대를 하기 전 양현석은 당시 '스파크' 팀으로 활동하면서 이주노의 소개로 가수 박남정을 만나 '박남정과 친구들' 에서 댄서겸 안무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첫 방송 출연이기도 했다.
당시, 솔로를 준비하던 정현철에게 양현석은 남자 셋으로 댄스와 노래를 같이 하면 어떨지 제안했었다.
이를 받아들인 정현철이 자신과 양현석 외에 다른 댄서 한 명을 찾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문난 댄서로 양현석 외에 이주노가 있었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주노의 영입은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는 양현석의 고백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결성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뮤직비디오가 방송을 타고 인기를 끌며 청소년들 사이에 톱스타로 등장했다. 당시에 볼 수 없던 춤, 새로운 리듬, 한국 가요계에 던진 신선함에 가요 팬들이 열광하면서 기존 가요 관계자들을 충격으로 빠트렸다. 대중의 욕구를 정확하게 파고든 노래의 성공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가 끝없이 높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해체를 선언하고 서태지 정현철 는 은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해 여러 이유를 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들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창작의 고통이 심해서 해체한다고만 밝혔다. 사람들의 평가는 본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의 소문에 대해 양현석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그 당시 양현석의 마음은 2012년에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르다 2013년에 나온 후속곡 '젠틀맨'으로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이자 세간에 쏟아진 '실패작' 이란 평가에 대한 양현석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양현석은 서태지 없이 뭐 하고 사나?
"서태지 없으면 이제부터 양현석은 뭐 하고 사나?"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식을 보던 사람들이 한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김혁이 회상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요? 첫 방송은 송창의 PD님이 적극 밀었어요."
남자배우 '천지인' 으로 활동하던 김혁의 이야기이다. 한때느 미국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을 통해 인기리에 활동한 DJ이기도 하고, 한국에선 부천에서 카페를 열어 수완을 발휘하더니 얼마 후엔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등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감자꼴엔터테인먼트에서 일을 맡은 남자다.
한국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고, 김혁은 실제 배우로 활동하려던 자신이 방송가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2년 당시만 하더라도 방송국 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첫 출연시키는 것 자체에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엔 방송에 출연시키려던 다른 가수가 있었는데 송창의 PD님이 서태지와 아이들 보고 '감' 이 왔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방송에 내보낸 거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가 된 양현석의 지상파 방송 첫 데뷔는 1992년 4월 11일 MBC 특종 TV연예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방송에선 '서태지와 아이들' 이란 이름으로 소개되었는데, 공교롭게도 MBC 특종 TV연예 프로그램은 이름 그대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를 알린 특종을 보도하게 된 셈이다.
세상이 우연이란 없으며 필연의 다른 말이라고 했던가?
당시 음악 PD들 사이에서도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이란 평을 들었는 노래가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난 알아요'란 곡이었다. 이 노래는 리메이크까지 되어 '특종 TV 연예' 의 타이틀 음악으로도 사용되었다.
서태지 아이들 해체 이후 양현석
서태지와 아이들은 유대영을 통해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방송이나 언론보다는 다운타운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방송이나 언론보다는 다운타운에서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92년 7월경부터 인기가 급상승하였는데 기성세대의 혹평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10대 청소년들에겐 큰 인기를 얻게 되는 기현상이 생겼다.
1994년 발표작 '교실이데아' 를 비롯해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10대 청소년들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당시에 양현석은 서태지의 어떤 가능성을 보고 합류를 결정 했을까?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YG 엔터테이먼트에서 가족 연습생을 선발하는 규정은 까다롭다고 소문이 났다. 진정한 실력파만 연습생으로 선발하는데 연습생이 된다고 해도 데뷔가 약속되는 건 아니며, 꾸준한 자기 연습과 노력을 거쳐야만 '때' 가 되었을 때에 데뷔를 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된 이유다.
그렇다면 양현석은 서태지를 처음 만난 당시에도 어떤 느낌을 갖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서태지에게 가능성이 없었다면 양현석은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서태지에게 양현석은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던 걸까?
물론 서태지의 데뷔 준비에 처음부터 양현석과 이주노가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춤 잘 추는 후배들을 소개해 주며 서태지에게 댄스팀을 꾸려줬던 양현석은 나중에 서태지로부터 직접 참여해 달라는 얘기를 듣고 결국 팀을 하게 되었다. 서태지가 보기에 양현석이 추천해준 후배들의 실력이 자신과 맞지 않았던 것 아닐까?
"양현석은 이제 뭐 하고 살아?"
그 무렵,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며 팬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꺼낸 이야기였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들이 무대 위에서 다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란 안타까움 외에도 팬들은 서태지와 양현석과 이주노를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1996년 1월 31일이 지나고 얼마 후, 팬들의 걱정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는 듯 양현석은 1996년 6월 신사동에 '현기획' 을 세워 자신이 가장 잘하던 일을 이어간다. '양현석' 의 이름 중에 '현' 을 따서 지은 기획사 이름이었다. 현기획의 첫 그룹은 '킵식스'였다. 많은 사람에게 기대를 받으며 스타가 만든 그룹이라는 초점이 더해지며 팬들도 기대했지만 킵식스는 실패하고 만다. 현기획도 창립 8개월 만에 간판을 내리고야 말았다.
물론, 거기서 포기할 양현석이 아니었다.
양현석은 현기획을 1998년 3월에 (주)양군기획으로 새로 상호를 바꾸고 의욕적으로 지누션을 영입했다.
그리고 지누션의 데뷔전까지 잉현도와 함께 곡을 선보이며 양군기획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기획사를 만들자마자 의욕적으로 영입한 가수였지만 양현석이 지누션에게 노래를 만들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앨범은 더더욱 기대할 시기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결국, 양현석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로 하고, 1998년 8월에 첫번째 솔로 앨범 '악마의 연기'를 발매하게 된다.
당시 사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이때 양현석이 무대로 다시 나온 이유가 '자금 사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그룹 실패 이후 극도로 자금 사정이 악화되자 지인에게 부탁하여 홍대 근처 모 건물의 지하로 사무실을 옮기고 다시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1998년 당시 양현석과 함께 무대에 선 백댄서는 현재 1박 2일 등 예능 프로그램에서 많은 활약을 하는 김종민이 있었다.
양현석이 이 앨범을 끝으로 프로듀서의 역활에 전념하게 되면서 김종민은 엄정화의 백댄서로 활동하는 등 경력을 살려 혼성 그룹 '코요테'의 멤버로 참여하게 된 게 눈길을 끈다.
자신이 '악마의 연기' 라는 솔로 앨범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가리켜 양현석은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었다고 할 뿐이었다.
그의 말처럼 양현석 스스로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이 당시를 기억하는 양현석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고백하기를 "더 이상 춤이 안 나왔다. 그래서 바로 그만두기로 했다." 라고 말했다. 양현석에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잠시 선택했던 무대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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